무엇을 찌르는지도 모른 채 휘두르는 칼

승리라는 백색소음에 길들여진 밤
스타트업 씬에 몸담고 있다 보면, 유독 '이겨야 한다'는 말을 사무실의 백색소음처럼 듣게 된다. 경쟁사보다 압도적인 지표를 만들어야 하고, 투자자 앞에서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며, 결국 이 척박한 시장에서 살아남아 끝내 승리해야 한다고들 말한다.
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나의 유능함이 증명되는 구조 속에서, 나 역시 그 치열한 소음에 맞춰 매일 전장에 나서는 참전 용사처럼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.
하지만 모니터 불빛만이 남은 텅 빈 사무실을 뒤로하고 퇴근하던 어느 밤, 나는 문득 생각했다. 도대체 이 밤잠 줄여가며 정신병에 걸리고 종종 토까지 쏠려가며 하는 치열한 싸움이 끝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. 돈일까. 진짜 나는 돈 때문에 이렇게 살아내는 걸까. 나는 무엇을 찌르는지도 모른 채, 그저 손에 쥐어진 칼을 미친 듯이 허공에 휘두르고만 있었던 것 같았다.
나는 그저 다치지 않고 '살아남았다'는 비루한 안도감을,
이런 혼란한 세상에 밥 벌어먹고 살만큼의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,
'이겼다'는 우아한 승전보로 착각하며 불안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.
빛나는 투사들 사이에서 마주한 나의 민낯
물론 이 척박한 전장에는 진짜 혁신을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사람들도 있다. 승리 자체에서 짜릿한 동력을 얻고,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깨부수며 쾌감을 느끼는 동료들을 볼 때면 나는 깊은 경외심마저 든다. 그들에게 이 싸움은 맹목적인 생존 투쟁이 아니라, 자신이 믿는 가치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가장 뜨겁고 순수한 증명일 것이다.
하지만 그들의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, 나는 역설적으로 내 안의 서늘한 진실을 직시해야 했다. 나의 심장은 그들과 같은 박자로 뛰지 않았다. 경쟁사를 꺾고 트래픽이 폭발했던 날, 우리는 샴페인을 터뜨리며 스스로를 승리자라 칭했지만 내게 그 달콤함은 너무도 찰나였다.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더 커진 목표치라는 괴물이 되어 목덜미를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.
돌이켜보면 내가 치렀던 싸움들은 판을 뒤집는 대단한 쟁취라기보다, 그저 다음 달의 월급을 확보하고 도태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처절한 방어전에 불과했던 것 같다. 나는 그저 씬에서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무의미한 주먹질을 반복하면서도, 나의 그 얄팍한 생존 본능을 거창한 비전과 혁신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이다.
승패의 감각을 지우고, 진짜 나의 궤적을 찾아서
승리 이후에 무엇이 남는지도 모른 채 관성적으로 싸우는 삶은, 결국 아주 느리고 확실하게 영혼을 갉아먹는 것 같다. 맹렬한 투쟁심과 성취욕이 기본값인 이 생태계에서 피 튀기는 승리의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보며, 근래에는 '나는 애초에 스타트업에 맞지 않는 인간인가' 하는 짙은 의심마저 들었다.
하지만 나는 이제 그 서늘한 의심을 기꺼이 끌어안기로 했다.
애초에 나에게 필요했던 건 '어떻게 이길 것인가'라는 얄팍한 전술이 아니라, '나는 무엇을 위해 이 전장에 서 있는가'라는 본질적인 물음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. 세상이 정해준 '스타트업형 인재'라는 틀에 나를 구겨 넣고 영혼 없이 화살을 쏘아대는 짓은 멈추고 싶다.
누군가는 싸움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승리를 연료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. 나는 그들의 뜨거운 궤적을 진심으로 응원한다. 다만, 나는 나와 맞지 않는 남의 옷을 입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타인의 트로피를 거머쥐기보다, 내 삶의 방향을 명확히 아는 단단한 빈손으로 서 있는 편이 훨씬 더 나다운 삶이라고 느꼈다.
이기고 지는 납작한 승패의 감각에서 벗어나,
이제는 내가 진정으로 가슴 뛰며 몰입할 수 있는,
나만의 가치를 찾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겠다고 다짐한다.
'생각 정리' 카테고리의 다른 글
| AI가 '모름'을 계산할 때, 인간은 무엇을 품어야 하는가 (0) | 2026.04.05 |
|---|---|
| 나는 농구를 좋아하지만, 딱 농구만 좋아하지 않는다. (0) | 2026.03.22 |
| 내 잔이 넘쳐야만 사랑인 줄 알았다 (0) | 2026.02.17 |
| 물음표는 갈취가 아니라 '투자'여야 한다 (0) | 2026.02.08 |